당신은 몰랐던 '샤넬'에 대한 진실

조회수 2020. 10. 23. 09:50 수정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번역중 Now in translation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다양한 분야의 재밌고 유익한 콘텐츠를 카카오 플랫폼 곳곳에서 발견하고, 공감하고, 공유해보세요.

샤넬의 힘, 나는 취향을 타협하지 않는다

누구나 하나쯤 갖고 싶어 한다는 프랑스 패션 브랜드 샤넬은 핸드백, 원피스, 향수, 귀걸이, 시계 등 다양한 제품을 선보이고 있다. 특히 샤넬(CHANEL)의 ‘C’가 교차된 로고가 금색으로 빛나는 핸드백의 인기가 높다.


언제 어디서나 세련된 고급스러운 분위기를 내는 최고의 아이템이란 상찬과 날로 비싸지는 값에 사치스럽다는 비판이 공존한다. 할머니가 사서 손녀에게 물려준다는 핸드백만큼, 전 세계에 걸쳐 수많은 사람들이 꼭 사고 싶어하는 것이 또 있다. 바로 현대적인 향수의 원조인 ‘샤넬N °5’다.


향수의 역사를 바꾸다

프랑스 중부 지방 출신의 가브리엘 “코코” 샤넬(Gabrielle “Coco” Chanel)은 장돌뱅이 아버지와 병약한 어머니 사이에 태어났는데, 폐결핵으로 어머니가 죽자 아버지는 첫째 가브리엘을 비롯한 세자매를 고아원에 맡겨버렸다.

먹고살기 위해
캬바레에서 노래를 했던 샤넬

열한 살에 버려진 가브리엘은 그 후로 두 번 다시 아버지를 만난 적 없다. 10대 시절에 가톨릭 기숙학교에서 수녀들로부터 바느질 등을 배웠고, 양복점과 여성 속옷 가게에서 일했다. 먹고살기 위해 밤이면 캬바레에서 노래했는데, 그가 즐겨 부른 노래는 잃어버린 개를 주제로 한 민요 <코코리코(꼬끼오)>와 <키쿠아뷔코코(누가 코코를 보았느냐?)>였다.

깡마른 그가 무대에서 노래하면, 군인을 비롯한 손님들이 “코코!”를 외쳤고 그것이 애칭이 되었다. 파리로 온 코코 샤넬은 부유한 남자들과 어울렸는데 그 가운데 영국인 폴로 선수이자 사업가 아서 카펠과 사랑에 빠졌다. 신분 차이로 미래를 약속하는 사이는 아니고, 당시 흔했던 애인(정부)이었다. 남자들의 돈에 기대어 하릴없이 치장하고 노는 대신, 샤넬은 경제적으로 자립하고 싶었다. 아서에게 후원을 받아 파리의 중심지 방돔 광장 근처의 캉봉가 21번지에 모자가게를 열었다.

당시 유행하던 화려하고 장식 많은 모자들과 달리, 비교적 단순하고 착용하기 편한 샤넬의 모자는 인기를 끌었다. 사업수완이 좋았던 아서는 프랑스의 대표적인 고급 휴양지로 부상한 노르망디 바닷가에 위치한 도빌에 모자와 옷을 판매하는 매장을 열라고 샤넬에게 조언한다. 1차 대전으로 인해 군인과 부자들이 도빌로 모여들면서, 당시 여성복에는 사용하지 않던 하늘거리는 저지 소재로 만든 샤넬의 옷들은 쉴 새 없이 팔려나갔다.

이에 또 다른 바닷가 휴양지인 비아리츠에도 매장을 열었고, 파리 매장을 같은 거리의 31번지로 옮겼다. 지금도 샤넬 파리 본점은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샤넬 제품에 적힌 ‘캉봉가 31번지  (31, Rue Cambon)’는 그 뜻이다.

이렇게 패션 사업가로서 성공한 샤넬은 아서에게 진 빚을 모두 갚았고, 다른 여자와 결혼한 아서와는 좋은 친구로 남았다. 얼마 후에는 러시아에서 프랑스로 망명한 귀족 로마노프 대공과 연인이 되었는데, 그에게 러시아 황제의 공식 조향사였던 에르네스트 보를 소개받았다. 그리고 모자와 옷에 이어 코코 샤넬은 향수를 만들기로 결심한다.

그가 조향사 에르네스트에게 내건 조건들이 있었다. 지금까지의 그 어떤 향수와도 다르게, 자신의 스타일로 조향부터 병까지 모두 바꾸고자 했다.

“나는 향수에만 모든 걸 다 넣고, 병에는 아무것도 넣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이 말은 향수의 모든 것을 바꾸겠다는 뜻이다. 당시 향수는 장미와 오렌지 꽃 등의 단일 천연향으로 만들었고, 향수병은 조각 작품처럼 화려한 장식의 고급스러운 병에 넣어서 팔았는데, 샤넬은 그렇게 하지 않겠다는 선언이었다.

여성의 향기를 연상시키는 꽃의 정수를 만들어달라는 샤넬의 요구에 에르네스트는 스물네 가지 종류의 천연 성분에, 재스민 향료와 다량의 알데히드(자극성이 강한 냄새가 나지만 휘발성이어서 돈이 많이 드는 합성물)를 혼합한 향의 샘플들을 제시했다.

전문지식은 부족해도 자신이 원하는 것이 분명하고, 그것이 제대로 만들어졌는지 알아보는 능력이 탁월했던 샤넬은 그 가운데 하나를 골라 몇 달 후에 판매하기로 했다. 천연이 아닌 인공적인 방식으로 만들어낸 신비로운 향에 어울리게 향수병도 평행 육면체의 단순한 유리병에 넣기로 했다. 그것은 전적으로 장식을 싫어하는 샤넬의 취향으로, 당시의 향수병과 달리 지나치게 평범한 모양이었다.

이런 과감한 선택으로 사람들의 시선은 독특한 향수병을 거쳐 곧바로 그에 담긴 금색으로 반짝이는 액체에 쏠리게 됐다. 기존 향수제품이 향보다 병에 집중한 판매를 했다면, 샤넬은 병에 담긴 향수를 부각시킨 것이다. 이로 인해 향을 맡기 전부터 낯설고 신비로운 분위기로 기대감이 더해지리라 예상했다.

샤넬의 예상대로, 그의 향수병은 너무 단순하다는 비난을 받기도 했지만 지금은 ‘향수병의 롤스로이스(고급 자동차의 대명사)’가 되었다. 여기에 ‘봄의 욕망’, ‘4월의 미소’, ‘저녁의 도취’ 같은 시적인 이름을 제품명으로 쓰던 관례를 깨고, 샤넬은 이미 유명한 자신의 이름을 검정색 대문자로 써서 붙이기로 했다. 파격에 파격을 거듭하는 샤넬의 결정에 당황한 에르네스트가 그것만은 절대로 안 된다고 반대했다.

“그래야 다른 향수들과 확실히 구별되죠.”

샤넬은 추상적인 기존 향수 이름들을 버리고 자신의 이름에 행운의 숫자로 믿은 번호 ‘5’를 붙였다. 그 결과물이 바로 ‘샤넬N°5’다.

30초마다 한 병씩 팔린다는 ‘샤넬 N°5’는 패션 브랜드 샤넬이 출시하는 하나의 향수 제품명을 넘어섰다. 그것은 여자들에게 관능과 매혹의 보통 명사가 되었다.

실제로 샤넬은 죽을 때까지 부유한 생활을 누릴 만큼 막대한 소득을 이 제품으로 벌었는데, 1971년 1월 25일자 <타임> 발표에 따르면 샤넬이 죽으면서 남긴 재산은 1,500만 달러(현재 가치로 대략 600억 원 이상)에 이른다. 이렇게 전에 없던 새로운 접근방식과 제품을 창조할 수 있었던 바탕은 무엇일까?


나는 취향을 타협하지 않는다

샤넬은 자신의 취향을 타협하지 않았다.

20대 초반부터 그는 불편한 여성용 승마복 대신 마부 소년들의 옷차림을 약간 변형시킨 중성적인 승마복을 주문해서 입었다. 1미터 50센티미터에 이르는 기다란 머리카락도 연인 카펠과 헤어지고 단발로 잘랐고, 그것이 일대 유행으로 번지면서 코코 샤넬은 패션의 아이콘이 되었다. 특히 코르셋과 원피스로 풍만한 여성미를 뽐내던 시대에 마른 몸의 자신에게 어울리는 편안하고 활동성이 좋은 남성적인 여성복 스타일을 창조했다.

이렇게 샤넬은 자신의 취향을 고집하되 항상 시대의 변화를 주목하고 있었다. 샤넬이 시도한 스타일을 요약하자면 자신처럼 ‘일하는 여성을 위한 옷’이다. 그것은 1차 대전 이후로 집안에 머물렀던 여성들이 일터로 나가기 시작하면서 장식성보다 실용성을 중시하는 시대 상황과도 잘 맞아떨어졌다.

‘패션의 검은 보석’으로 불리는 ‘리틀 블랙 드레스’도 이브닝 드레스가 아닌 활동성이 좋은 옷으로 만들었다. 영화 <티파니에서 아침을>에서 오드리 헵번이 입었던 리틀 블랙 드레스의 세련된 아름다움은 샤넬이 없었다면 만들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이렇게 샤넬은 다양한 분야의 예술가들과 적극적으로 교류하면서 자신의 취향을 풍성하게 발전시켰다.


다양한 만남에서 길어 올린 새로운 생각

고아원에서 자란 샤넬은 패션의 독학자였다. 그는 자신의 취향과 감각으로 모자부터 드레스, 향수와 액세서리 등을 디자인했는데, 예술가들과의 만남은 그에게 패션을 둘러싼 다양한 분야를 습득하는 기회가 됐다. 만약 그가 패션 사업가로 성공해서 그 분야에만 머물렀다면, 샤넬의 이름은 지금과는 다른 뜻으로 전해질 것이다.

패션 사업가로 이름을 얻은 1920년대부터 그는 친구들을 통해 예술의 수도가 된 파리로 모여든 여러 국적의 예술가들과 폭넓게 교류했다. 그는 재능 있는 이들의 작품 활동과 생활고를 해결해주기 위해 자신의 재산을 아낌없이 사용했다.

특히 러시아 발레를 유럽에 소개한 디아길레프의 공연에 필요한 비용 전액을 부담했고, 극도의 생활고에 시달렸던 현대 음악 작곡가 스트라빈스키의 거처와 생활비를 평생에 걸쳐 챙겼고, 자신이 사랑했던 시인 피에르 르베르디에겐 시집을 출판해서 인세를 보내주는 방식으로 수입을 보장해줬다. 그의 자존심을 지켜주기 위한 세심한 배려였다.

이렇게 다양한 분야의 예술가들을 후원하고 그들과 적극 교류하고 지내면서 샤넬은 예술과 문화, 교양과 이국 문화 등에 대해 알아나갔다. 러시아 예술가들을 통해 접한 러시아 자수를 옷 디자인에 접목했고, ‘샤넬 N°5’의 병 모양도 가깝게 지내던 피카소와 브라크가 주도한 입체주의의 영향으로 분석된다.

한 분야에서 성공하면 대체로 만족하며 그에 머물면서 성공의 방식을 되풀이하기 마련이다. 하지만 샤넬은 자신의 취향을 확실히 유지하면서도 항상 새로움을 추구하는 예술가들을 통해 새로운 아이디어를 많이, 자주 접했고 그 가운데서 자신의 취향과 시대 상황에 부합하는 디자인을 만들어냈다.

향수와 옷은 제품이지만,
인간의 마음이 담겨 있는 물건이다.

그래서 이성적인 설득보다 감성적인 유혹이 유리하다. 샤넬은 당대의 여성들을 세련됨과 편리함으로, 지금은 그에 더해 고급스러움과 우아함으로 유혹한다.


이 콘텐츠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