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을지로 감성'이 식상해졌다고?

조회수 2020. 3. 13. 11:02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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힙지로2.0 시대를 이끄는 식당들

Writer 조성준 : 경제신문 기자. 잘 먹는 것도 재테크라고 여긴다.


태초에 호텔수선화(카페)와 신도시(펍)가 있었다. 철공소, 인쇄소가 미로처럼 얽힌 을지로3가 골목, 그 사이 비밀 아지트 같은 두 곳은 입소문을 탔다. 젊은 예술가(혹은 예술가 지망생)들은 호텔수선화에 와서 맥북을 펴놓고 제각각 무언가에 골몰했다. 힙스터들은 신도시에서 시티팝과 함께 흐느적거리며 자유를 만끽했다. 때마침 뉴트로 열풍까지 불었다. 을지로 골목에 비밀스러운 카페, 식당, 술집이 우후죽순 생겨났다. 을지로는 ‘힙지로’로 불리기 시작했다. 노포들도 수혜를 입었다. 이제 여름철 만선호프가 있는 맥주 골목은 걷기 어려울 만큼 북적거린다. 동원집에서 감자탕 한 그릇 먹으려 해도 줄을 서야 한다.


을지로3가는 완벽하게 떴지만, 부작용도 있다. 얼기설기 ‘을지로’ 감성만 내세우고 정작 기본은 무시한 곳들이 적지 않게 생겼다. 물티슈 대신 냅킨에 물을 적셔서 주거나, 저렴하지 않은 와인을 팔면서도 플라스틱 글라스를 내주는 식이다. 그런 곳은 대개 화장실 위생도 끔찍하고, 왠지 모르게 나른한 눈동자를 한 주인의 접객도 엉망이다. 음식은 ‘이걸 돈 주고 파나’라는 생각이 들 만큼 엉터리다. 그래서 이젠 ‘힙지로’를 회의적으로 보고, 식상하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하지만, 이 모든 난장 속에서도 을지로의 격을 한 단계 높여 줄만한 곳들도 생겨나고 있다. 개성으로 무장하고도 정돈됐으며, 친절하고, 미식의 기쁨까지 주는 곳들이다.


보석 : 을지로의 보석

삿포로에 가봤거나, 혹은 가보지 않은 사람들에게도 겨울철 그곳에 대한 어떤 환상이 있을 테다. 특히, 영화 ‘러브레터’를 본 사람들은 삿포로를 눈의 왕국으로 기억할 것이다. 새하얀 왕국에 밤이 찾아오면, 조그만 선술집들이 아늑한 빛을 내뿜으며 여행자를 유혹한다. 삿포로 눈길을 뽀드득 걷다가 골목에 있는 오뎅바 문을 스르르 연다고 상상해보자. 오뎅 국물에서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른다. 추위에 움츠러들었던 몸이 사르르 녹는다. 따뜻하게 데운 술잔을 두 손으로 감싸면 안도감이 든다. 그 술을 한잔 들이켜고 오뎅을 한입 베어 문다. 왠지 위로받는 느낌이다. 을지로 술집 보석을 소개하기에 앞서 삿포로 이야기를 늘어놓은 이유가 있다. 보석은 삿포로 여행 중 그곳 오뎅바에서 영감을 받은 부부가 차린 가게다.

보석은 요즘 을지로에서 가장 뜨거운 곳이다. 몇 분 만에 한 달 치 예약이 꽉 찰 정도다. 삿포로 오뎅바에서 착안한 가게답게 내부는 아담하다. 시그니처 메뉴는 오뎅탕이다. 홋카이도와 부산 기장에서 나온 다시마로 육수를 낸다. 알스지, 무, 죽순, 곤약 등 오뎅탕에 들어갈 재료를 고를 수 있다. 국물은 리필 가능하다. 신선한 식재료를 사용한 위트 넘치는 메뉴들이 많다. 명란을 시키면 감태에 싸 먹을 수 있도록 내주는데, 두 재료의 조화가 절묘하다. 우보카도 메뉴도 보석의 보물이다. 아보카도 위에 우니를 가득 올려 김에 싸 먹는 음식이다. 아보카도의 리치한 식감과 우니의 바다향이 의외로 잘 어울린다. 서해안에서 올라온 꽃게로 만든 양념게장과 동해안에서 산지 직송한 백골뱅이 구이도 인기가 많다. 이곳 메뉴 대부분은 정석에서 조금 비켜 간 작품들이다. 의외의 조합에서 뜻밖의 궁합을 찾는 방식이다. 최근엔 서브 식당으로 ‘보너스’라는 곳도 개업했다.


+ Location : 서울 중구 저동2가 마른내로 11-10 3층

+ Contact : Insta. @euljiro_boseok M. 010-3434-1245


기원 : “이런 게 바로 재즈지”

“재즈란 어떤 음악인가요?” 재즈 애호가 무라카미 하루키는 저 질문에 대답하기 위해 무려 삼십 년 전 기억을 꺼낸다. 이십 대 중반 하루키는 소설가가 아니었다. 그는 아담한 재즈 바 주인이자 바텐더였다. 하루키 술집 근처엔 주일 미군 부대가 있었다. 종종 미군들이 바를 찾았다. 그 중엔 조용한 흑인 병사 하나가 있었다. 그는 하루키에게 빌리 홀리데이 음악을 신청하곤 했다. 어느 날 흑인 병사는 평소처럼 빌리 홀리데이를 틀어달라고 부탁하고 카운터 구석에 앉았다. 그는 빌리 홀리데이의 신산한 목소리를 들으며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울었다. 하루키는 나중에야 알았다. 흑인 병사는 고향이 그리워질 때마다 자신의 가게에 와서 빌리 홀리데이를 들었다는 것을. 하루키는 이 기억을 풀어놓으며 “이런 게 바로 재즈지”라고 결말을 맺는다. 담백한 문체로 유명한 하루키치고는 제법 장황한 ‘재즈에 대한 정의’다.



안타깝지만 이제 재즈를 듣는 사람은 소수다. ‘어려운 음악’이라는 인식 때문인지 재즈 인기는 오래전 식었다. 찰리 파커, 마일스 데이비스, 존 콜트레인 등 재즈 전설들은 한때 대중음악 스타였다. 하지만 이제 그들은 고전 음악가처럼 고리타분한 뮤지션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그런 의미에서, ‘을지로 재즈 바’ 기원은 등장 자체로 소중하다. 기원은 좋은 스피커로 재즈 음악을 틀어주는 데서 그치지 않는다. ‘한 줌’이라고 할 수 있는 국내 재즈 뮤지션을 초청해 정기적으로 공연을 한다. 재즈 리스너와 아티스트 모두를 위한 공간인 셈이다. 물론, 재즈가 낯선 사람에게도 기원은 매력적인 공간이다. 을지로 열풍에 올라타 어영부영 문을 연 여러 술집과 달리, 기원은 와인 바로서의 기본을 제대로 갖췄다. 30여 종의 칵테일 리스트도 준비돼 있다. 어둡지만, 그래서 아늑한 기원은 술 한 잔 마시며 하루의 피곤함을 털어내기 좋은 공간이다. 흥겹고, 슬프고, 우아한 재즈 선율은 보너스다. 음악과 함께 나른하게 취하다 보면 문득 이런 생각이 들지도. “이런 게 바로 재즈지”


+ Location : 서울 중구 을지로9길 14

+ Contact : Insta. @___key001



오카구라 : 낮에는 라멘, 밤에는 술집

만선호프에서 조금 더 안쪽 골목으로 들어가면 오카구라가 있다. 이곳은 신설동 이자카야에서 오래 경력을 쌓은 셰프가 재작년 을지로에 진출해 연 가게다. 1층은 전 좌석이 바 테이블이다. 손님이 붐비는 점심시간에도 눈치 보지 않고 혼밥하기 좋다. 테이블이 마련된 2층에선 일행들과 편안히 식사를 할 수 있다. 낮 주력 메뉴는 라멘이다. 시그니처 메뉴는 매콤한 우마카라 돈코츠 라멘이다. 매운맛 강도를 조절할 수 있다. 가장 높은 레벨도 아주 맵진 않고 칼칼한 정도다. 자가제면으로 뽑은 탄탄한 면발에서는 꼬들꼬들한 식감을 즐길 수 있다. 삼겹살로 만든 차슈 껍데기에선 불맛이 강하게 난다. 국물은 정통 돈코츠 라멘과 비교해 살짝 가벼운 편이다. 느끼해서 일본 라멘을 잘 못 먹는 사람들에겐 제격이다. 이치란 라멘이 떠오르기도 하는데, 매력은 이치란 못지않다. 전날 과음한 사람에게 해장으로도 추천할만한 한 그릇이다. 라면만으로는 허전한 사람들을 위해 국물에 말아 먹을 밥은 무료로 제공된다.


저녁에 오카구라는 이자카야로 변신한다. 모둠회, 튀김, 구이, 탕 등 이자카야 대표 메뉴 대부분이 마련돼 있다. 그중에서도 꼬치구이가 유명하다. 모둠으로 주문하면 11개 종류 꼬치가 차례대로 나온다. 숯불 향이 그윽하게 올라오는 꼬치는 호불호 없이 누구나 좋아할 만하다. 숯불에 토치까지 사용해 구운 꼬치는 ‘겉은 바삭, 속은 촉촉’ 정석을 보여준다. 하이볼 한 잔을 들이켜고, 닭 연골 꼬치를 오독오독 씹어보자. 그날의 스트레스가 하이볼 위에 뜬 기포처럼 보글보글 날아갈지도 모른다.


+ Location : 서울 중구 을지로11길 26-5

+ Contact : T. 02-2261-4977


섬광 : 을지로보다 더 을지로 같은

섬광의 위치는 을지로3가역 인근이 아닌 충무로역 8번 출구 근처다. 그곳엔 진양상가가 있다. 마치 사이버 펑크 세계관을 연상시키는 진양상가(무려 건축가는 김수근이다)는 한때 ‘도심의 흉물’로 손가락질받았다. 하지만 이젠 을지로 열풍 덕분에 레트로 감성의 상징이 됐다. 진양상가에서 세운상가까지 이르는 길 좌우엔 유명한 노포 산수갑산(순대)과 황평집(닭무침)이 있다. 아무튼, 진양상가 초입 근처에 있는 섬광은 을지로보다 더 을지로 같은 분위기 속에 자리 잡은 셈이다. 섬광 역시 간판은 없다. 게다가 엘리베이터도 없는 건물 5층에 있다.

낯선 진양상가를 거쳐 다소 음침한 건물을 5층까지 올라 섬광의 문을 열면, 말 그대로 ‘섬광’ 같은 느낌이 와락 다가온다. 카운터 쪽을 제외하면 모든 벽에 커다란 창문이 나 있다. 거기에서 대낮의 햇살이 쏟아져 들어온다. 창밖으로는 진양상가가 보인다. 80년대 홍콩 영화 속 거리를 옮겨놓은 듯한 뷰다. 마침 카운터엔 80년대 홍콩스타 장국영 얼굴이 박혀있는 바이닐이 전시돼 있다. 테이블 간격이 넓고 전체적으로 회색이다. 을지로 특유의 휑뎅그렁한 느낌이 풍긴다. 하지만 우드 재질로 마감한 카운터에선 또 포근한 기운이 감돈다.

섬광은 낮엔 카페, 저녁엔 와인바다. 커피와 함께 곁들이는 디저트로 제철 과일을 올린 토스트가 인기다. 다양한 내추럴 와인도 구비돼 있다. 술과 곁들일 안주도 제법 구색을 갖췄다. 을지로 카페, 술집 대다수는 실내를 노출 콘크리트로 시공했다. 그 중에선 에폭시 처리를 안 해 천장이나 벽에 곰팡이가 덕지덕지 피어오른 곳도 꽤 있다. 그런 건 빈티지가 아니라 빈티다. 천장에서 석회 가루가 떨어지지 않을까 염려해야 할 정도다. 섬광은 노출 콘크리트 느낌을 살리면서도 너저분하지 않다. 이해하기 어려운 키치한 소품의 나열도 없다. 그러면서도, 티슈부터 코스터까지 직접 디자인해 제작할 만큼의 섬세함을 갖췄다. ‘을지로적’이라는 수식어가 칭찬과 조롱 두 가지 의미로 쓰이는 요즘, 섬광은 좋은 의미로 ‘을지로적’이다.


+ Location : 서울 중구 창경궁로1길 38

+ Contact : Insta. @seomgwangbar P. 070-8866-84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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