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종신처럼 살 수 있을까?

조회수 2020. 5. 14. 15:20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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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RITER 이기원 : 세상 모든 물건과 금방 사랑에 빠지는 콘텐츠 제작자.


“젊었을 때는 빨리 안정되고 싶었어요. ‘안정’과 ‘정착’이 최선이자 정답이라고 굳게 믿어왔고 거기에 의문을 제기하지 않았던 거죠. 요즘은 바로 내일 일을 모른 채 살고 있어요. 눈앞에 펼쳐지는 고민과 갈등을 곧장 수습하지 않고 가만히 바라보고 있어요. 정해진 것이 없는 생활과 흔들리는 생각들에 마음껏 설레하면서요.”

<월간 윤종신> 2019년12월호


“야, 쌓아놓은 재력이 있으니까 저게 되지. 우리 같은 일개미들이 어떻게 저래. 나도 돈만 있으면 윤종신처럼 살고 싶다.”


지난해 윤종신이 모든 일을 중단하고 1년 정도 해외로 떠나겠다고 선언했을 때, 친구들은 이렇게 말했다. 지나친 반응은 아니었다. 소식을 접한 평범한 직장인들의 마음은 대부분 비슷했을 것이다. 부러움 섞인 탄식 같은 것.


하지만 대체로 인생의 큰 결정은 돈이 많아서, 여유가 있어서 할 수 있는 건 아니다. ‘지금 아니면 안 되겠어', ‘지금 못하면 평생 후회할 것 같아’ 같은 내적인 절박함이 동력이 된다. 물론 선택이라는 건 대체로 늘 제로섬 게임이라 이걸 하고 싶다면 저걸 포기해야 한다.


윤종신은 이 짧은 외출을 위해 본인이 해오던 방송일을 포기했다. 사실 대중의 관심을 먹고 사는 유명인에게 1년의 공백이란 생각보다 큰 것이다. 자신의 빈자리를 누군가 대체할 수도, 대중들의 관심이 크게 떨어질 수도 있다. 윤종신이라고 그런 불안이 없었을 리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떠날 수밖에 없었던 건 그 자신에게도 어떤 변곡점이 필요했기 때문일 것이다.

<데뷔 초기 윤종신의 앳된 모습>


사실 윤종신은 여러 가지 의미에서 입지전적인 인물이다. 그의 스토리는 1세대 재벌의 성공신화를 듣는 것처럼 비현실적인 느낌이 있다. 공일오비의 객원보컬로 시작해 솔로 가수로 데뷔 후, 동료들의 어깨너머로 작곡을 배워 이내 다른 가수들에게 곡을 주는 프로 작곡가의 삶을 산다. 어느 날 갑자기 치열한 예능 바닥에 게스트로 들어가더니 이제는 한 프로그램을 온전히 이끌 수 있는 메인 진행자가 됐다. 그와 동시에 수많은 소속 연예인을 거느린 엔터테인먼트 사의 대주주기도 하다. 익숙하지 않은 필드에 훅 뛰어들 수 있는 과감함, 그리고 일단 뛰어든 뒤에는 빠르게 적응하며 그는 성공한 아티스트이자 비즈니스맨이 됐다. 한 가지 분야에서도 성공하기 힘든 세상에 대단한 성과다. 물론 그에게도 힘든 순간은 있었다.



<2000년대 초반의 사진이다. 윤종신은 이 즈음을 뭔가 잘 안 풀리고, 답답했던 때로 기억한다>


윤종신은 9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음반 판매 실적이 준수했던 가수였지만 제대 후 발매한 7~10집이 모두 실패하면서 심리적, 경제적으로 꽤 큰 타격을 입었다. 물론 이건 음악이 나빠서가 아니라 음반 시장 자체가 격변하는 시기였기 때문이다. 스트리밍과 싱글 위주로 움직이는 시장에서 그가 공들여 만든 음악이 설 자리는 없었다. 음악으로 먹고살기 힘들지도 모른다는 위기감으로 선택한 것이 예능 출연이었다. 이미 라디오로 단련된 말솜씨와 깐족대는 캐릭터 메이킹 덕분에 그는 예능에서 나쁘지 않은 활약을 보였다. 문제는 예능인 윤종신이 자리를 잡아갈수록 가수 윤종신은 점점 작아졌다는 것이다.

<월간 윤종신>은 올해로 10주년을 맞는다>


예능인 윤종신은 <라디오 스타>나 <패밀리가 떴다> 같은 인기 프로그램에 출연하면서 궤도권에 접어들었지만 가수 윤종신은 그렇지 못했다. 방법을 모색하던 그가 선택한 것이 우리 모두 아는 <월간 윤종신> 프로젝트다. 매달 한 곡의 싱글을 디지털로 발표하겠다던 이 프로젝트는 꽤 무모해 보였던 것이 사실이다. 당시 윤종신은 이미 방송 스케줄이 상당히 많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가 이 프로젝트를 강행한 건 ‘이러다 음악을 완전히 잃어버릴지도 모른다’는 불안 때문이었다. 본업은 음악이고, 음악을 할 때 제일 즐거운데, 이걸 놓을 수는 없어서 찾아낸 궁여지책이었다.

<‘좋니’의 대히트는 이후 ‘윤종신 좋니?’라는 이름의 콘서트 타이틀로도 쓰였다>


사실 일이 잘 안 풀릴 때 제일 좋은 해결책은 기발한 방법을 찾는 게 아니라 미련한 방법을 택하는 것이다. 윤종신은 정말 매달 한 곡씩을 발표했다. 큰 반향이 없어도 실망하지 않고 계속 음악을 발표했다. 이 무던함, 이 끈질김. 3년 전 <좋니>가 그 해 최고의 히트곡이 된 건 단순한 행운이 아니었다. 성실하고 꾸준히 해온 음악 작업에 필연적으로 따라온 결과였다.


2010년 4월 처음 시작했던 <월간 윤종신>은 올해로 벌써 10년째를 맞는다. 한 달이 1년이 되고, 1년이 10년이 되는 동안 그는 방심하지 않고 꾸준히 음악을 했다. 13년간 매주 <라디오 스타>를 진행하면서도 결석이 거의 없었다. 윤종신의 가장 큰 재능은 그의 음악적 역량이나 말솜씨가 아니라 새로운 시도를 두려워하지 않는 실행력, 그리고 그걸 꾸준하게 밀고 나가는 성실함이었을 지도 모른다.

윤종신은 떠나기 전 자신의 SNS에 이런 글을 올렸다.

“고인 물이 되지 않으려는 한 창작자의 몸부림이라 생각해 달라. 낯선 곳에서 나는 어떤 사람인지, 나는 얼마나 멀리 갈 수 있는 사람인지 나 자신에게 질문을 던져보고 싶었다. 낯선 곳으로 무작정 떠나서 직접 살아보는 것 말고는 대체할 수 있는 방법이 없을 것 같다.”


2020년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는 일정량의 불안과 권태를 안고 산다. 변화나 탈출구를 모색하려 애써 보기도 하지만 대부분은 지금까지 살아온 삶의 관성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변화가 두려워서, 스스로를 믿지 못해서, 혹은 현재를 버릴 수 없어서.


나는 떠난 윤종신을 보며 대리만족 비슷한 감정을 느꼈다. 그는 친절한 여행 가이드처럼 50대에도 훌쩍 떠날 수 있다는 걸, 인생을 조금 더 멀리 바라봐도 된다는 걸 알려준다. 그가 빨리 돌아와 그간의 이야기보따리를 풀어놨으면 좋겠다. 아니, 그가 빨리 돌아왔으면 하는 진짜 이유는 윤종신 없는 <라디오 스타>가 너무 심심하기 때문이다. 라스는 역시 윤종신의 주워 먹는 개그가 있어야 제맛이다.




윤종신에게 아이패드 프로 4



윤종신은 인스타그램을 통해 간간이 소식을 전하고 있다. 현재 미국에 있는 것으로 보이는 그는 이 와중에 신곡도 내고 호텔방 안에서 맥북을 앞에 두고 인스타 라이브도 진행한다.

재미있는 우연은 <월간 윤종신>과 아이패드 1세대가 모두 올해로 10주년을 맞은 동갑내기라는 것이다. 그리고 얼마 전 애플은 북미 시장에 기습적으로 아이패드 프로 4를 발매했다. 매직 키보드나 라이다 탑재 등 흥미로운 구석이 많다. 물론 호평을 받았던 사이드 카 기능도 여전해 맥북과 연결하면 듀얼 모니터로도 활용할 수 있다. 아이패드 프로 4와 함께라면 그의 작업 효율이 더 올라갈 것 같다. 참고로 아이패드 프로 4는 4월 말에서 5월 초 사이 한국에 정식 발매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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