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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가장 중요한 여성" 전세계가 극찬한 50살 한국인

조회수 2020. 9. 24. 10:22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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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게 무슨 재즈냐" 소리 듣던 이 사람 현대 재즈 보컬의 상징이 됩니다.
재즈 보컬리스트 나윤선 씨
'지하철 1호선' 데뷔, 파리에서 재즈 공부
한국 보컬 최초 프랑스 오피시에장 수훈

'오늘날 가장 위대하고 훌륭한 재즈 싱어는 한국인이다.'

'그의 목소리는 한마디로 기적이다.'

'현재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여성 가수다.'


프랑스, 독일, 영국 등 세계 언론이 극찬하는 한국인 재즈 보컬리스트가 있다. '이 세상의 것이라고 믿기지 않는 목소리'로 노래하는 사람. 바로 나윤선(50)씨다. 재즈만 20년 넘게 한 그는 올해 초 10집 앨범을 냈고 얼마 전 프랑스 문화 예술 훈장 '오피시에(Officier)'를 받았다. 프랑스 문화 예술 훈장은 3개 등급이다. 최고 등급순으로 꼬망되르(Commandeur), 오피시에, 슈발리에(Chevalie)다. 2009년 슈발리에 훈장에 이어 10년 만에 받는 두 번째 훈장이다. 훈장 받은 소감을 묻자 그는 '가문의 영광'이자 '감사하다'고 수줍게 답했다.


무대 위에 선 나윤선씨는 빨라지는 연주에 맞춰 거칠고 세졌다가도 이내 다시 수줍은 듯 소리를 뱉는다. 연주자와 관객과 눈을 맞추면서 즉흥적이고 또 자유로운 음악으로 공연장을 채운다. 그는 전 세계를 돌아다니면서 공연을 해 한국에서는 볼 수 있는 기회가 적다. 마침 12월12일부터 시작하는 전국 투어를 위해 잠시 귀국한 나윤선씨를 만날 수 있었다.

출처: 엔플러그 제공
나윤선 씨

◇음악가 부모님 밑에서 자랐지만 음악가 꿈꾸지 않아


"항상 음악이 주변에 있었지만 음악가의 꿈은 꾸지 않았습니다. 부모님께서 한국 음악의 선구자 같은 분이십니다. 힘들어하는 모습, 새벽까지 잠 못 주무시는 모습 등을 옆에서 보고 있으니 '음악은 어려운 것'이라는 인상이 깊게 박혔어요. 환상보다 현실을 먼저 안 것이죠."


나윤선씨의 아버지는 국립합창단 나영수 전 단장, 어머니는 예그린 악단 출신 성악가 김미정씨다. 국립합창단은 국내 최초의 프로 합창단이고 예그린은 국내 최초의 뮤지컬 악단이다. 지금 생각해보면 이런 부모님 밑에서 일찍부터 음악을 접하면서 살 수 있던 게 행운이었다고 한다.


학창시절 음악을 따로 배울 생각은 없었고 단지 라디오 듣는 걸 좋아했다. 그리고 고등학교 졸업 후에는 불문과에 진학했다. 고등학교 교생 선생님 중 한 명이 불문과 출신이었다. 수업이 끝나면 샹송을 틀어주곤 했다. 그때 샹송이 특이하게 다가왔다. 그는 "팝송이나 가요와는 달랐다"면서 "'싱, 샹, 송' 어떤 얘기를 하는 듯해 알아듣고 싶어 불문과를 갔다"고 했다.


샹송 연구동아리에서 활동하고 대학교 2학년 때는 샹송대회에 나가 대상도 받았다. 부상으로 프랑스 아비뇽 한 달 연수도 갈 수 있어서 휴학하고 1년 동안 프랑스에서 샹송만 듣다 왔다. 대학교 졸업 후에는 한 의류회사 카피라이터로 취직했다. 남들이 다 취업 준비를 하길래 따라서 했다고 한다. 그리고 8개월 만에 퇴사했다.

출처: tbs 시민의방송 유튜브 캡처
지하철 1호선으로 데뷔했다. 가장 왼쪽이 나윤선씨다.

◇지하철 1호선 데뷔, 한국에서 1집 발매


백수로 지내면서 친구 권유로 록 음악극 '지하철 1호선'에 데모 테이프를 보냈다. 얼떨결에 주연으로 뽑혔다.


"그때 같이 하던 배우가 설경구, 이두일 등 프로였습니다. 하면 할수록 양심에 찔리기도 하고 못하겠어서 초연만 출연했어요. 역할이 서울에 올라와 어리숙하고 주눅든 연변 여인이었는데, 사람들이 정말 연변에서 온 줄 알았다고 해요. 제가 정말 무대 위에서 시선 처리도 못하고 무서웠거든요. 두 번 더 무대에 오르고 뮤지컬은 접었습니다."


1995년 프랑스로 떠났다. 노래를 배우고 싶었다. 노래 중에서도 재즈를 더 알고 싶었다. 최초의 재즈 스쿨(CIM)에 입학했지만 재즈를 처음 접하고 충격을 받아 다시 한국으로 돌아올 뻔했다고 한다.


"미국 재즈를 듣고 모델로 삼을 수 있는 사람이 대부분 허스키 목소리, 풍부한 성량을 가진 흑인 여성이었어요. 흉내를 내려니 안되더군요. 선생님께 제 목소리로는 안될 것 같다고 털어놨죠. 이런 저를 잡아준 건 선생님이었습니다.


제 고민을 듣던 선생님은 한참을 웃더니 다양한 재즈를 들려줬어요. 전혀 재즈가 아닌 것 같은 음악도 재즈였습니다. 그때 제가 하고 싶은 대로 해도 된다는 것을 깨달았죠. 그 뒤로 재즈 스쿨 세 군데를 더 다녔습니다. 성악, 테크닉 등을 더 배우고 싶었어요. 6년 차에는 교수 제안도 받았다. 서양 애들과는 다르게 공부한다면서 이걸 그대로 가르쳐달라고 하더군요. 1년 정도하고, 앞으로 가르치는 것보다 하고 싶은 게 더 많아서 그만하겠다고 했죠."


프랑스에서는 정식 가수가 아니더라도 재즈를 배우는 순간부터 크고 작은 무대에 오른다. 나윤선씨는 "나이, 인종, 배경, 성별 등 상관없이 한 무대에 설 수 있는 게 재즈"라고 말했다. 그도 학생 때부터 무대에 올랐고 '몬트리올 재즈 페스티벌, 프랑스 생모르 재즈 콩쿠르 대상, 라데팡스 콩쿠르 특별상 등을 받았다. 이렇게 서서히 재즈 보컬리스트로 이름을 알렸다.

출처: officialyounsunnah·SYNONYM86 유튜브 캡처
공연하는 모습.

◇‘저게 무슨 재즈냐’며 타박 듣기도


2001년 나윤선씨는 ‘나윤선 퀸텟’을 결성해 많은 무대에 올랐고 국내에서 1집 앨범 ‘Reflet’도 발매했다. 프랑스에서 배운 것을 정리하고 기념하는 앨범이었다. 외국 생활을 끝내고 한국에 들어 올 생각이었다. 그러나 앨범을 낼 때마다 해외에서 공연요청이 끊이지 않아 해외 생활을 다시 시작했고 6집부터는 독일 ACT레이블에서 앨범을 발매했다. 8년 동안 재즈 보컬리스트로 생활하다 2009년 프랑스 문화 예술 훈장 ‘슈발리에’를 받았다.


“얼떨떨했어요. 처음엔 외국 사람인 나에게 왜 이상을 주는지 의아했습니다. 이 상은 프랑스 문화·예술을 알린 사람에게 주는 문화 공로 훈장입니다. 의미를 알고 나서는 가문의 영광이었죠. 또 프랑스가 다시 한번 문화 강국이라는 걸 느끼기도 했습니다. 이런 상을 주면서 수상자를 프랑스 문화 사절단으로 만드는 것이죠. 열심히 해야겠다는 생각도 했습니다.”


‘현대 재즈 보컬의 상징’, ‘재즈 보컬 역사와 전설을 이을 유일무이한 아티스트’, 그때 그리고 지금까지도 나윤선씨를 향해 쏟아지던 찬사다. 세계적인 재즈 가수로 우뚝 섰지만 그러기까지 쉽지만은 않았다. 콩쿠르에 나갔을 때 심사위원 한 명은 ‘저게 무슨 재즈냐’며 그가 상 받는 것을 극구 반대하기도 했다. 또 재즈 스쿨 3학년 때 선 첫 무대에서는 하지 말아야 할 것들만 다 했다고 한다.


“눈을 뜨질 못했어요. 머리가 하얘져서 가사도 다 잊었죠. 계속 눈을 감고 있으니 관객은 물론 무대 위 연주자와도 호흡할 수 없었습니다. 내가 눈을 감더라도 감각은 다 살아있어야 한다는 걸 그날 배웠어요. 악기 하나하나를 다 듣고 서로 주거니 받거니 하면서 음악을 만드는 게 재즈기 때문이죠. 그러나 지금도 무대 공포증은 심해요. 노래하는 건 괜찮은데 말하는 건 아직 어렵습니다.”

출처: 엔플러그 제공
10집 앨범 커버(좌), 오피시에 훈장을 받은 나윤선씨(우)

◇"목표? 내 인생은 즉흥적인 재즈"


나윤선씨는 재즈라는 서양 음악을 하지만 아리랑 전도사기도 하다. 해외 공연에서도 아리랑을 부르는 것은 물론 2014년 소치 올림픽 폐막식에서도 아리랑을 불러 화제였다. 활발한 활동을 하면서 ‘프랑스 골든 디스크’, ‘독일 에코 재즈 어워드’, ‘한국대중음악상’ 등을 수상했고, 올해 초에는 10집 앨범 ‘Immersion’을 발매했다. 그리고 지난 11월 두 번째 훈장을 받았다. 그는 “저를 잊지 않고 10년 만에 또 찾아주셔서 감동이고 감사하다”고 했다.


재즈라면 지치지 않을 것 같아 보이지만 그 역시도 힘든 날이 많다고 한다. “제 음악 빼고 다 완벽해 보입니다. 그래서 더 잘하고 싶고 그만하고 싶을 때도 많아요. 주위에는 훌륭한 분들이 너무 많고 닮고 싶다는 생각도 해요. 그분으로 다시 태어나지 않는 이상 그만큼 잘하는 건 불가능하죠. 한편으로는 이런 결핍과 부족함이 저를 더 나아갈 수 있게 하는 원동력이기도 합니다.”


이런 나윤선씨는 자신의 인생은 재즈와 같다고 한다. 즉흥적이고 자유롭다는 의미다. 앞으로의 목표를 물었지만 돌아온 답은 그의 인생관처럼 ‘없다’였다. 전에도 그랬고 지금도,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고 한다. 다만 지금처럼만 열심히 살고 싶다고 한다. 마지막으로 재즈 보컬리스트를 꿈꾸는 후배들에게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


“저는 청년들에게 꿈을 가지라는 말을 하기가 꺼려집니다. 저는 음악가 집안에서 태어났어요. 조금은 나은 환경에서 출발한 셈이에요. 그럼에도 음악은 토끼가 아니라 거북이라고 말해주고 싶습니다. 시간과 노력을 투자해 오래 버티는 사람이 결국 해냅니다. 또 정말 하고 싶다면 하고 싶은 대로 하세요. 인간의 목소리가 제일 아름다운 악기인 이유는 색깔이 다 다르기 때문이에요. 다르게 생겨서 아름다운 건데 다른 사람 기준에 맞춰 똑같이 만들지 마세요. 본인의 색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고 그 모습을 보여주면 듣는 사람도 분명 그걸 느낄 겁니다."


글 jobsN 이승아 

jobarajob@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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