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아인의 대사가 한마디도 없다고?

조회수 2020. 10. 12. 17:28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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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 '소리도 없이' 만개한 아이러니 속 스며든 무고한 惡

여전히 우리 사회에 만연한 악의 평범성

거친 호흡만으로 마력을 발하는 유아인의 존재감

유아인, 유재명 주연 영화 ‘소리도 없이’가 개봉 소식을 알렸다. 한나 아렌트가 역설한 ‘악의 평범성’이 자연스레 상기되는 작품으로, 유아인이 한 마디의 대사도 없이 거친 호흡만으로 스크린을 장악해 감탄을 자아냈다. 

영화 '소리도 없이' 스틸. 사진 에이스메이커

먹고 살기 위해 시작했던 범죄 조직의 청소부 일이 이제는 일상이 된 창복(유재명)과 태인(유아인). 그들은 범죄 조직의 하청을 받아 근면성실하고 전문적으로 시체 수습을 하며 살아간다. 어느 날 단골이었던 범죄 조직의 실장 용석에게 사람을 하나 맡아 달라는 부탁을 받고, 유괴된 11살 아이 초희(문승아)를 억지로 떠맡게 된 두 사람.


하루만 데리고 있으면 된다는 말에 꺼림칙함에도 아이를 데려온 그들이지만, 다음 날 아이를 돌려주고 싶어하던 두 사람 앞에 나타난 것은 용석의 시체뿐이다. 어찌할 바를 모른 채 아이의 거취를 고민하는 창복과 태인은 이내 예기치 못한 사건에 휘말리고, 평화롭던 일상은 송두리째 흔들린다.

영화 '소리도 없이' 스틸. 사진 에이스메이커

한나 아렌트가 역설한 ‘악의 평범성’은 나치에 의한 홀로코스트가 특별한 악인이 아닌 사회구조에 순응하던 지극히 평범한 사람들에 의해 자행됐음을 지적한 개념이다. 아렌트에 따르면 악은 평범하고 진부한 것으로, 타인을 생각하지 않는 태도로부터 악은 돋아난다. 타인의 고통을 헤아릴 줄 모르는 생각의 무능이, 올바름을 외면하는 무능을 낳는 것이다. 그렇게 악은 괴이한 존재의 내면에 자리한 것이 아닌, 인가 사회 저변 어디에나 위치해 있다. 


그렇다면 아렌트가 악의 평범성을 역설한지 반세기가 더 지난 지금, 우리 주변에 있던 악은 과연 사라졌을까. 물론 그렇지 않다. 많은 학자와 지식인, 명사들이 악이란 얼마나 평범한 것인가에 대해 나눴던 수많은 논의가 무색하게도 악은 우리의 당연한 일상이 돼, 악으로 인지하기조차 힘겨울 지경이다. 각자의 안위와 개인의 삶을 무기로, 뒤틀린 사회 구조를 핑계로 타인의 아픔을 외면하고 책임을 회피하는 일들은 비일비재하다. 

영화 '소리도 없이' 스틸. 사진 에이스메이커

‘소리도 없이’는 바로 그러한 우리 사회의 현실을 스크린에 담아낸 작품이다. 평범한 악이 얼마나 우리 사회 깊숙이 내재해있고, 만연한가에 대해 다루고 있는 것이다.


주인공 창복과 태인 일당을 비롯해 극에 등장하는 많은 인물들은 살인과 시체유기, 유괴 등 극악무도의 범죄를 저지르지만, 자기 자신이 죄를 짓고 있다는 생각을 하지 않는다. 그들에게 있어 자신이 행하는 범죄는 그저 묵묵히 수행해야 하는 주어진 생업(生業)일 따름이다.


때문인지 그들은 타인을 대함에 있어 무례하지도 않을뿐더러, 일면 대단히 상식적이고 수더분한 사람들로 비춰진다. 그들에게 있어 자신이 행하는 일들에 대한 죄악감은 조금도 엿보이지 않는다. 모두의 외면과 무관심, 냉대 속에서 악은 소리도 없이 자연스레 일상에 스며든다.


이는 유괴를 당한 아이 초희 조차 피해 갈 수 없다. 선과 악에 대한 판단의 기준조차 성립되지 않은 아이들은 어른의 악행으로부터 자연스레 물들고, 자신의 생존을 위해 악을 적극 품는다. 영화의 시작과 끝에서 관객은 상황이 만들어낸 아이러니 속에 피어난, 숙명과도 같은 악의 가면을 마주하게 된다.  

영화 '소리도 없이' 스틸. 사진 에이스메이커

영화에 담긴 메시지를 차치하고서라도 ‘소리도 없이’는 색다른 장르적 재미를 선사하는 스릴러다. 이야기의 구조는 여러 번 뒤틀려, 익숙한 듯 신선한 매력을 뽐낸다. 끔찍한 악행을 저지르는 와중 평온하게 오가는 악인들의 대화와 행동에는 은은한 유머까지 깃들어있고, 무심하면서도 일상적인 영화의 분위기가 친숙함과 섬뜩함을 동시에 자아낸다.


유아인과 유재명을 비롯한 베테랑 배우들은 노련한 솜씨를 바탕으로 각 캐릭터가 갖는 개성을 유려하게 표현했다. 평범한 악을 연기했던 이들인 만큼, 그들의 악은 화냄이 없었으며, 일상이었고, 생업이었다. 수많은 아이히만이 스크린에 등장하는 모습을 보고 있자면, 얼굴만 다를 뿐 현실과 크게 다르지 않음에 새삼 통탄할 따름이다. 

영화 '소리도 없이' 스틸. 사진 에이스메이커

유아인의 존재감은 특히 빛났다. 캐릭터 설정 상, 극 중 대사가 한마디도 없던 유아인지만, 거친 숨소리와 행동, 표정만으로 관객을 온전히 영화에 몰입시킨다. 그가 발하는 강렬한 마력에 보는 이는 호흡을 빼앗기고, 부지불식간에 영화 속 세상으로 빠져든다. 얼핏 과해 눈살을 찌푸리게 만들다가도 오묘하게 무게 중심을 잡아 이야기를 끌고 가는 그의 능수능란함에 박수를 보낸다.


많은 것을 펼쳐냈지만, 차분히 정리해내지는 못한 이야기 구성은 아쉽다. 소리 없이 일상에 스며든 악에 대해 되돌아보는 성찰의 계기는 마련했지만, 결국 영화가 지향하는 바가 무엇인지는 명확히 와 닿지 않는다. 고민할 거리 없이 가볍게 영화를 즐기고자 하는 관객에게도 추천할만한 장르적 재미가 충만하지만, 호불호가 극명히 갈릴 여지가 있겠다.


개봉: 10월 15일/관람등급: 15세 이상관람가/출연: 유아인, 유재명, 문승아/감독: 홍의정/제작: ㈜루이스픽쳐스·BROEDMACHINE/배급: (주)에이스메이커무비웍스 /러닝타임: 99분/별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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