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너무 부끄럽다" 서울 개발 움트게 한 탄원서

조회수 2020. 10. 20. 15:52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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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구 1000만명의 공룡 도시가 된 서울. 과연 서울은 어떻게 만들어졌을까. 땅집고는 서울 도시계획 역사를 다룬 손정목 전 서울시 도시계획국장의 저서 ‘서울도시계획 이야기(한울)’의 주요 내용을 바탕으로 서울의 공간 구조 형성에 숨겨진 스토리를 살펴봤습니다.


[서울 도시계획 이야기] ⑨서울 도심 재개발은 어떻게 시작됐나


서울 도심 재개발이 시작된 것은 1967년 쯤부터라고 볼 수 있다. 당시 재개발 계기는 세 가지가 있었다. 우선 미국 제 36대 대통령 존슨의 방한이다. 존슨 대통령은 1966년 10월 31일 한국을 방문했다. 존슨 대통령의 방한은 10월 24~25일 필리핀 마닐라에서 개최하는 베트남전쟁 참전 7개국 정상회담에 참석하기 위해 뉴질랜드, 호주, 필리핀, 태국, 말레이시아, 한국을 순방하는 일정 중 하나였다.


당시 존슨 대통령은 공식·비공식 수행원 350명, 수행기자 130명과 함께 다녔다. 유사 이래 최대 손님을 맞게 된 정부와 서울시는 환영 인원을 동원하기로 했다. 서울시청 앞 광장에 30만명이 넘는 학생과 시민이 모였다.


[땅집고] 1966년 방한한 존슨 미국 대통령 환영 시민대회가 열린 서울시청 앞 광장에 운집한 시민들. /서울도시계획이야기(손정목)

한미 양국 방송사는 존슨 대통령의 김포공항 출발부터 실황중계를 시작했고 시청앞 광장 환영식이 하이라이트였다. 그러나 김포공항부터 시청까지 환영 장면만 찍기에 지루했던 미국 측 TV 촬영 기자들이 두 대통령 내외가 앉아 있는 평화대에서 다른 곳으로 카메라 초점을 돌리기 시작했다. 화면에는 시청 맞은편 중국인 마을, 중국인 마을 뒤쪽의 남창동, 회현동, 남산 중턱을 비롯해 3~4층에 불과한 한국은행 본관, 신세계백화점, 1930년대 이전에 지은 일본 적산가옥, 무허가 판잣집들이 비춰졌다.


서울 한복판인 시청 앞 광장이 슬럼지대라는 사실을 본 미국인과 전 세계인들은 놀라워했다. 한국의 베트남 파병으로 대다수 미국인과 유럽인은 한국을 제법 잘사는 나라로 인식하게 됐다. 그런 인식을 갖고 있는데 TV로 보는 실상은 달랐기 때문이다.


[땅집고] 재개발되기 이전 서울 중구 소공지구. /서울도시계획이야기(손정목)

이를 부끄럽게 여겼던 것은 미국에 이민가서 살거나 유학생으로 나가있던 교민들이었다. 1966년 말에서 1967년 초 미국에 있는 여러 교민회는 “서울시청 주변 슬럼지대를 깨끗하게 해달라는 탄원서를 보내자”고 의견을 모았고 1967~1968년 의견서가 청와대 민원비서실에 접수돼 박정희 대통령에게 직접 보고됐다. 이것이 서울 도심재개발을 촉진한 첫째 이유다.


그러나 서울 도심부 재개발이 본격화하기 시작한 것은 다음의 두 가지 이유 때문이다. 첫째는 남북적십자회담이다. 1972년 조국평화통일 원칙 등 7개 항목을 골자로 하는 7·4 남북공동성명이 발표되면서 약 2개월 후인 8월 30일 남북적십자회담 1차 본회담이 평양에서 개최되고 2차 회담은 9월 13일 서울에서 개최하게 된다.

[땅집고] 1972년 9월 13일 서울 조선호텔에서 남북적십자회담 제2차 본회담이 열렸지만 아무런 합의없이 약 2시간만에 끝났다. /조선DB

이에 따라 북측 대표단원과 수행기자 54명이 서울에 들어와 4박5일간 머문다. 박정희 대통령은 서울의 낡고 추한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도심 재개발 사업이 무엇보다 먼저 촉진돼야 했다. 기자들은 남산 타워호텔, 소공동 조선호텔, 도큐호텔, 워커힐 등에서 일정을 진행했다. 정부는 이들이 서울에 머무는 동안 고궁, 박물관, 북악스카이웨이, 강변도로, 경부고속도로, 현충사 등을 보여주면서 서울의 발전된 모습을 과시했다.


둘째 요인은 박정희 대통령 개인의 의지였다. 1973년 박정희 대통령이 연두 순시를 하며 내무부 장관실에서 바라본 도렴동, 적선동, 내자동, 내수동, 당주동, 체부동 등에 들어선 한옥지대의 모습을 내려다봤다. 그런데 한옥이 초라해보였던 박 대통령이 "저런 곳에서 자라난 아이들이 장차 무슨 큰 일을 하겠느냐"며 "빨리 재개발을 추진해서 어떤 외국 수도에도 손색이 없도록 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이런 세 가지 요인이 서울 도심부 재개발에 박차를 가하게 된 계기가 된 것이다.



정리= 전현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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