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합 검색어 입력폼

임신중단은 국가 승낙의 '조건부 권리'가 아닙니다

조회수 2020. 10. 7. 19:10 수정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번역중 Now in translation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다양한 분야의 재밌고 유익한 콘텐츠를 카카오 플랫폼 곳곳에서 발견하고, 공감하고, 공유해보세요.

모자보건법 입법예고안은 힘든 조건의 여성들을 더 힘들게 합니다.

정부의 입법예고안은 오래 전부터 일부 법학자 분들과 법무부 내부에서 무슨 금과옥조처럼 개정입법 방향으로 참고해 온 독일 형법의 ‘낙태죄’ 모델을 가져온 것입니다.

모자보건법 입법예고안의 주요 내용

- 임신 14주 내까지 낙태 전면 허용
- 임신 14주~24주까지는 성범죄나 건강 경제상 이유로 낙태 가능
- 의사의 거부권 규정(종교적 신념 등)

독일 형법 218조, “나치 시대 법 폐지하라”

하지만 정작 독일의 여성들은 “나치 시대의 법을 폐지하라”며 이 법과 수십 년째 싸우고 있는 중이에요. 독일 형법 218조는 여전히 임신중지를 한 여성에게 벌금 또는 최대 3년 이하의 징역에 처하도록 규정하고 있고, 성폭력으로 인한 임신이거나 의학적으로 심각한 문제가 있는 경우, 임신 12주 이내에 상담을 받고 3일의 숙려 기간을 거친 경우가 아니면 모두 불법으로 남아 있습니다.

출처: Bündnis für sexuelle Selbstbestimmung, CC BY NC ND, 2019년 8월 22일 촬영
독일 형법 218조 폐지 시위 장면

게다가 작년(2019년) 3월까지 219조a 조항에 따라 임신중지를 시행하는 의사와 병원이 자신의 병원에서 임신중지를 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리는 것만으로도 처벌을 받을 수 있어서 이 조항으로 처벌을 받게 된 의사의 긴 싸움 끝에 겨우 이 조항만 일부 개정이 되었습니다. 그래도 여전히 ‘임신중지 시술을 한다’는 사실 외에는 이 병원에서 어떤 방법으로 임신중지를 하는지, 무엇이 안전한지 어떤 정보도 알릴 수가 없어요. 여성의 안전에도, 보건의료상으로도 해악이 큽니다.

2018년에 독일이나 지금 정부가 내놓은 입법예고안의 틀과 같은 방식으로 법을 개정한 아일랜드에서도 상담과 숙려기간 의무제 때문에 3일 전에 상담을 받았던 의사가 3일 후 재방문 했을 때 부재한 상태라면 다시 상담을 받고 3일을 기다려야 합니다. 그 사이 임신 12주를 넘기게 되면 상담과 숙려기간 의무제 때문에 합법이던 임신중지가 불법이 되어버리죠. 아직도 수많은 아일랜드의 여성들이 영국이나 네덜란드 등 다른 나라로 임신중지를 하러 가고 있습니다.

며칠 전 독일 활동가에게 한국의 정부와 입법자들, 일부 법학자들이 독일 모델을 좋은 모델로 참고하고 있다고 전했더니 아주 개탄을 하더군요. 지금 정부가 내놓은 ‘낙태죄’의 개정 입법안은 이미 실패한 해외 법제의 종합판입니다.

임신중지 결정 시기가 늦어지는 조건에 있는 여성들—임신 사실을 늦게 인지하게 되는 여성들—특히 청소년과 장애인, 이미 다른 자녀를 돌봐야 하는 여성들, 직장에 다니고 있는 여성들, 폭력이나 학대 상황에 있는 여성 등 더 힘든 조건에 있는 여성들에게 ‘너가 왜 힘든지를 입증하라. 안 그러면 처벌받는다’며, 상담 먼저 받고 하루를 기다려서 다시 병원을 찾아가라, 그런데 의사는 널 거부할 수도 있으니 알아서 또 병원 찾아가라 하는 내용이에요.

존치되는 낙태죄는 특히 청소년, 장애인, 다자녀 여성, 직장여성, 피폭력 피학대 여성 등 더 힘든 조건에 있는 여성들을 더 힘들게 합니다.

구체적으로 따져 처벌하겠다?

정부의 입법예고안은 헌법재판소가 헌법불합치 결정을 내린 형법 269조 1항과 270조 1항의 처벌 조항을 형법에 그대로 존치하겠다는 것입니다. 낙태 허용 요건(270조의2 신설)을 제시하였다고는 하나, 그에 앞서 처벌을 전제하고 있습니다.

이런 법이 만들어지면, 여성의 건강권과 평등권, 자기결정권은 온전한 헌법상의 권리로서 보장받지 못합니다. 정부 입법예고안대로라면 여성의 권리는 국가의 허락에 의한 ‘조건부’의 권리가 됩니다. 여성에 대한 처벌을 끝내 유지하며 정부가 여성의 권리 자격을 심사하겠다는 거죠.

한마디로, 보건복지부 입법예고안은 여성의 자기낙태를 ‘더 구체적으로 따져서 처벌하겠다’는 셈입니다. 낙태 허용 기간의 제한이 있으면 임신중지를 더 일찍 하고, 낙태 허용 기간에 제한이 없으면 임신중지를 늦게 하는 문제가 아니에요. 자기 몸에 관한 선택을 법적 제약에 따라 결정해서도 안 되고요. 기간의 제한 없이 여성의 선택권을 존중해야 합니다.

임신중단은 여성의 권리입니다. 왜 여성의 권리를 국가가 승낙하고 그 기간을 제한해야 합니까?

이 나라는 도대체 여성들을 뭘로 보고 있는 걸까요. 30~40년 전 만들어진 법 때문에 전 세계의 여성들이 임신중지의 완전한 비범죄화를 위해 수십년 째 싸우고 있습니다. 2020년인데, 우리의 출발은 좀 달라야 하지 않겠습니까.

‘낙태죄’의 완전한 폐지와 ‘성과 재생산 권리 보장법’의 제정만이 그 시작이 될 수 있습니다.


슬로우뉴스 좋으셨나요?

이미지를 클릭 하시면 후원페이지가 열립니다.

후원은 언감생심이라고요? ^^; 
그렇다면 이 글을 SNS에 소개해주세요. 
슬로우뉴스에 큰 힘이 됩니다!

이 콘텐츠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